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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쓰기

밤은 무엇 하러 저다지 아름다운가

by 우산 신동호 2021. 5. 24.

“하나님께선 무엇 때문에 밤을 마련하섯나? 

우리를 재우시기 위해 우리를 아모 생각 업시 쉬이게 하시기 위해 마련하섯다면 

밤은 무엇 하러 저다지 아름다워야 할 것인가?”

(이태준 전집5, 「사상의 월야」, 작자의 말 중에서)

 

 

이태준이 그린 아름다운 밤길을 걷고 싶었다.

눈이 내려 더 아름다운...

 

 

 

눈 예보가 있던 날.

잠을 설치다가 눈을 떠보니

눈이 내렸다.

 

 

비몽 사몽 집을 나섰다.

 

 

Valentina Lisitsa

Beethoven "Moonlight" Sonata 

 

어둠 속.

생각이 머리를 밝힌다.

 

 

이태준의 소설을 생각하며,

해방전후 민초의 삶을 그리며 걸었다.

 

 

어둠 속에

빛을 갈구했던 삶

 

 

과거가 외국이라는 충격적인 사실

 

"우리는 공식적으로 일제강점기란 말을 쓴다.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아 직접적 경험이 없는 세대에게 그 말이 환기하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완장을 두른 일본 헌병이나 군도를 찬 일본 순사에게 선량한 백의민족이 발길질당하고 좌지우지되는 이미지가 주된 것일 터이다. 그러한 영화적 장면이 크게 보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상황을 추상화하고 현실성을 배제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단일한 이미지를 생생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로 바꾸는 것이 역사교육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사 중심의 역사교육은 적정한 역사적 상상력을 세련시키지 못한다. 당대 생활에 밀착한 사회사 교육만이 적정한 과거 이해를 기약할 수 있다. 사회사로 무장한 역사적 상상력을 발동해야 비로소 과거가 외국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역사교육이 우리 과거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우리 역사에 자랑스럽고 눈부신 부분이 없다거나 우리 역사가 어두운 검정색 일변도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연구가설을 지지하기 위하여 반대되는 자료들은 무시하고 편향적으로 자료조사를 하는 연구자 등 자기기만 균형 잡힌 안목에 기초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과거이해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심층적 자기기만과 결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냉철한 주제 파악과 내내 담을 쌓고 말 것임을 우려할 뿐이다.

오늘의 우리가 선인들과 비교하여 압도적으로 양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의 인지와 자각은 괜한 과거 미화나 개칠보다 한결 견고한 자긍심과 자신감 있는 미래 전망을 우리에게 안겨줄 것이다. 과거라는 거울이 주는 교훈도 여러 갈래요 가지가지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기기만을 넘어서』 - 유종호

 

 

왕조의 열등감과 초조감이 만들어낸 허상의 권력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다. 나라가 거덜 나고 있을 때 고종은 황실 기능을 역대 최대 규모로 키웠다. 요즘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궁내부가 돈도 직접 찍고 홍삼도 직접 팔고 세금까지 직접 거뒀다. 해외 투자자도 직접 찾았다. 그 돈으로 탄광도 직접 개발하고 철도도 직접 깔았다. ‘도통(道統)과 치통(治統)을 겸비한 초월적 성인(聖人) 군주’라는 간판을 내세워 황제가 시장의 말단까지 지배하려 했지만 사실은 저물어가는 왕조의 열등감과 초조감이 만들어낸 허상의 권력에 불과했다."

 

『대통령이 펀드 수금하는 나라』 - 선우정 칼럼

그리고, 나라는 망했고,

망한 후에도 고종의 잔치는 계속되었다.

 

 

“함박눈이 펄펄 내리나 햇빛 받으면 녹아 없어지리라

그럼에도 자신을 기꺼이 낮추지 못하고 폼만 잡으며 자주 교만함을 부리는구나.”

 

 

일제강점기(1)

일본의 속국 백성으로 사는 것이...별양 못한 것이 없었다.

 

"일본이 항복을 하던 바로 전의 삼사 년에, 공출이야 징용이야 하면서 별안간 군색함과 불안이 생겼던 것이지, 그 밖에는 나라가 망하여 없어지고 일본의 속국 백성으로 사는 것이, 경술년 이전 나라가 있어 가지고 조선 백성으로 살 적보다 별양 못한 것이 한 생원에게는 없었다. 여전히 남의 세토를 지어, 절반 이상이나 도지를 물고 그 나머지를 천신하는 가난한 소작인이요, 순사나 일인이나 면서기들의 교만과 압박보다 못할 것도 없거니와 더할 것도 없었다.

독립이 된 이 앞으로도, 그것이 천지개벽이 아닌 이상 가난뱅이 농투성이가 느닷없이 부자 장자 될 이치가 없는 것이요, 원 아전이나 일본 놈 대신에, 만만하고 가난한 농투성이를 핍박하는 '권세 있는 양반들'이 생겨날 것이요 할 것이매, 빼앗겼던 나라를 도로 찾아 다시금 조선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조금도 신통하거나 반가울 것이 없었다.

원과 토반과 아전이 있어, 토색질이나 하고 붙잡아 때리기나 하고 교만이나 피우고, 하되 세미는 국가의 이름으로 꼬박꼬박 받아 가면서 백성은 죽어야 모른 체를 하고 하는 나라의 백성으로도 살아 보았다...(중략)

동학혁명이 끝나고 새로 부임한 원이 동학 잔당을 비질하듯 잡아 죽였는데, 동학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한생원의 부친도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는 허위자백을 하였고, 피땀으로 마련했던 논을 원에 바치고 풀려났다."

 

『논 이야기』- 채만식

 

일제강점기(2)

국내 잔류 인구 치고 완전히 친일행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8·15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는 것은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이다. 대부분 국내 거주자들의 독립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점진적으로 꺼져버린 시기에 8·15가 왔을 뿐 아니라, 그 해방은 연합군의 군사적 승리라는 타력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해방을 위해 이렇다 할 기여를 한 바 없는 국내 거주자들에게 당연한 자괴감과 죄책감을 안겨준 게 사실이다. 이러한 자괴감과 죄책감은 완강한 자격지심으로 굳어지고 그것은 흔히 그렇듯이 몇몇 과잉반응으로 분출되고는 하였다.

이렇다 할 행동적 기여가 없었던 터라 반일적 혹은 민족주의적 정치 실천에 대한 과도한 중요성 부여와 소위 친일행위자에 대한 광범위한 규탄이 그것이다.  친일행위자에 대한 규탄은 당연한 것으로 거기에 원론적인 이의를 제기할 여지는 없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매국행위로 작위와 거액의 상여금을 수령한 적극적 원조급과 일제 말기의 피동적 생계행 행위자를 일괄 처리하고 규탄하는 것은 형평성을 잃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또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식민지 체제에서 초기의 반일 실천자가 친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나 엄격히 말해서 국내 잔류 인구 치고 완전히 친일행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는 상황에 대한 이해 부족도 문제이다. 처음부터 사태를 정확하고 정직하게 서술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결여돼 있었다."

 

『자기기만을 넘어서』 - 유종호

 

 

일제강점기(3)

돈만 가지면야 좀 좋은 세상인가?

 

"자식도 소용없어, 더구나 딸자식…… 그저 내 수중에 돈이 있어야...."

초시는 돈의 긴요성을 날로 날로 더욱 심각하게 느끼었다.

"돈만 가지면야 좀 좋은 세상인가?"

심심해서 운동삼아 좀 나다녀 보면 거리마다 짓느니 고층건축들이요, 동네마다 느느니 그림 같은 문화주택들이다. 조금만 정신을 놓아도 물에서 갓 튀어나온 메기처럼 미끈미끈한 자동차가 등덜미에서 소리를 꽥 지른다. 돌아다보면 운전수는 눈을 부릅떴고 그 뒤에는 금시곗줄이 번쩍거리는 살진 중년 신사가 빙그레 웃고 앉았는 것이었다.

"예순이 낼 모레…. 젠장할 것."

 

적어도 삼천 원의 순이익이 오륙만 원은 될 것이라, 만 원 하나야 어디로 가랴 하는 타협이 생기어서 안초시는 으슬으슬 그, 이를테면 사위녀석격인 청년의 뒤를 따라나섰다...

 

일 년이 지났다.

모두 꿈이었다. 꿈이라도 너무 악한 꿈이었다. 삼천 원어치 땅을 사놓고 날마다 신문을 훑어보며 수소문을 하여도 거기는 축항이 된단 말이 신문에도, 소문에도 나지 않았다. 용당포와 다사도에는 땅값이 삼십 배가 올랐느니 오십 배가 올랐느니 하고 졸부들이 생겼다는 소문이 있어도 여기는 감감소식일 뿐 아니라 나중에 역시 이것도 박희완 영감을 통해 알고 보니 그 관변 모씨에게 박희완 영감부터 속아 떨어진 것이었다.

 

축항 후보지로 측량까지 하기는 하였으나 무슨 결점으로인지 중지되고 마는 바람에 너무 기민하게 거기다 땅을 샀던, 그 모씨가 그 땅 처치에 곤란하여 꾸민 연극이었다."

 

『복덕방』 - 이태준 (1947)

 

 

이 소설을 읽으며 소름이 끼쳤다.

일제강점기 민초의 삶이 어쩌면 지금과 똑같은지?

 

 

일제강점기(4)

내 몸이 죽되 원수 일본을 위하는 죽음이 되어야 하는, 이 모순된 번민

 

"일반지원병제도와 학생특별지원병제도 때문에 뜻 아닌 죽음이기보다, 뜻 아닌 살인, 살인이라도 내 민족에게 유일한 희망을 주고 있는 중국이나 영미나 소련의 우군을 죽여야 하는, 그리고 내 몸이 죽되 원수 일본을 위하는 죽음이 되어야 하는, 이 모순된 번민으로 행여나 무슨 해결을 얻을까 해서 더듬고 더듬다가는 한낱 소설가인 현을 찾아와 준 청년도 한둘이 아니었다. 현은 하루 이틀 동안에 극도의 신경쇠약이 된 청년도 보았고 다녀간 지 한 주일 뒤에 자살하는 유서를 보내온 청년도 있었다. 이런 심각한 민족의 번민을 현은 제 몸만이 학병 자신이 아니라 해서 혼자 뒷날을 사려해 가며 같은 불행한 형제로서의 울분을 절제할 수는 없었다." 

 

『해방 전후』 - 이태준 (1946)

 

 

일제강점기(5)

먹고산다는 것은...누구에게나 절박한 문제였다.

 

"식민지 치하에서도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며 자기의 꿈을 키워나가고 낭만적 사랑도 실천하고 사람으로서의 여러 가지 도리를 이행해야 했다. 먹고산다는 것은 극소수의 자산가나 지주 집안의 자손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절박한 문제였다. 그들에게 열려 있는 길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하나의 가까운 일자리로 군을 선택하고 그리하여 지원병으로 나가 원통하고 위로받지 못하는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 같은 지원병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의 일자리로 군을 택한 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군뿐 아니라 일자리를 찾아 식민지 체제 운영에 필요한 여러 기관에 참여한 사람들은 수다하다."

 

『자기기만을 넘어서』 - 유종호

 

 

 

초중고를 다니면서 주변 어른과 선생님께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은 탓에 "공산당이 싫어요!"는 부동의 진리였다. 교련 시간에 목총을 들거나, 학교 운동장의 태극기를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할 때는 묘한 감동을 느꼈다. 대학에서는 생각도 없이 얼떨결에 친구 따라 데모를 했다. 광주에서 폭도의 소요가 있었는데 진압이 되었다는 최규하 대통령의 발표를 들었을 뿐이고, 신현확과 전두환을 왜 물러나라고 하는지 생각이 없었다.

 

한참 후에 김대중 대통령이 복권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알게 되었고, 나의 무식이 부끄러워 해금된 서적을 몇 권 읽었다. 지배층 중심의 역사만 알았던 내게 피지배층의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장길산, 임꺽정, 남부군을 읽으면서 악한으로만 생각했던 산적과 빨치산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다. 정부와 양반의 압제로 살기 어려운 민중은 산으로 도망쳐서 힘든 삶을 살고, 해방이 되어 산에서 내려와도 변한 것이 없는 현실에 공산주의자가 되고 다시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그들 앞에 나타난 공산주의자 김일성과 괴뢰군은 해방군이었다.

해방이후 일제가 남겨두고 간 귀속재산은 1947년부터 민간에 불하됐고,

북한에선 무상몰수 무상분배,

남한에선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을 했다.

 

 

그런데, 남북이 분단된 후에 인구는 남한 약 1,600만명, 북한이 약 900만 정도였다.

어떤 이유로 남한 인구가 더 많았을까?

 

일제의 남농북공(南農北工)정책으로 기간산업이 남한에 비해 월등하고,

토지 무상분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 중에 북측 점령지에 남지 않고 남으로 남으로 피난 온 이유는 무얼까?

 

 

위에 인용한 두 편의 소설을 쓴 '이태준' 작가는 광복 이후에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에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노력했고, 월북 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분도 '자본주의'에 물든 우리 민중의 삶을 그린 것을 보면, 일본강점기에 이미 더 많은 국민이 자본주의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이니까 이렇게 생명을 부지하고 살 수 있지

 

"죽어도 고향에 돌아가서 죽고 싶다는 철호의 어머니였다. 그러고는, "이게 어디 사람 사는 게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며 한숨과 함께 무릎을 치며 꺼지듯이 풀썩 주저앉곤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철호는, "어머니, 그래도 남한은 이렇게 자유스럽지 않아요?" 하고, 남한이니까 이렇게 생명을 부지하고 살 수 있지, 만일 북한 고향으로 간다면 당장에 죽는 것이라고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갖은 이야기를 다 예로 들어가며 어머니에게 타일러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을 늙은 어머니에게 이해시키기란 38선을 인식시키기보다도 몇백 갑절 더 힘드는 일이었다. 아니,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했다. 그래 끝내 철호는 어머니에게 자유라는 것을 설명하는 일을 단념하고 말았다..."

 

『오발탄』 - 이범선 (1959)

 

 

자본주의와 자유를 원한 민중이 많았다.

허울 뿐인 무상분배보다는 유상분배를 원했다.

개인의 소유를 인정않는 공산주의보다는

싸게 사서 내 땅이 되는 자본주의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한에 더 많은 인구가 모였고,

총선에서 불리해진 김일성 정권은 남북한 총선을 거부했다.

 

 

빨치산과 토벌군은 '선과 악'인가?

 

북한에서 반동분자를 처단하고,

남한에서 빨치산을 토벌한 것은,

각각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각자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남과 북은 이념에 따라 갈라졌고,

북한의 김일성은 공산주의를

남한의 이승만은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한 지도자였다.

 

 

남한이 공산화 되는 것을 막은 것은

우리 지도자와 국민 덕분이 아닌가?

촛불 정권도 민주주의가 확립된 나라여서 생길 수 있었고...

 

 

이런 나라에서

아직도 이념분쟁과 갈라치기가 판을 친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누자."

 

최근 정운찬 님이 발표한 『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에

수긍되는 내용이 많아서, 글의 일부를 옮긴다.

 

 

소수에 의한 소득과 부의 독점과 기회의 불평등

 

"한국사회는 산업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소수에 의한 소득과 부의 독점과 기회의 불평등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1997년 IMF 경제위기를 경험한 후, 한국 경제는 크게 성장하지는 못하면서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격차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저성장과 양극화가 악순환하는 사회에서는 공동체적 가치를 유지하기 어렵다."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

 

"나는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격차와 용인하면 안 되는 격차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용인할 수 있는 격차는 '기회 평등'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기회가 평등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수용할 수 없다. 만약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못한다면 적극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한다.
또한 불공정한 상태를 방치하여 만들어진 격차, 혹은 부정행위로 만들어진 격차 역시 용인할 수 없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경쟁이 효과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진 규칙과 감시기구가 중요한 이유는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여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함이다. "

 

 

유연성과 유동성을 확보

 

"한편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이 승자와 패자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패한 구성원과 승리한 구성원 사이에 격차가 너무 벌어져 마침내 양극화가 고착되는 것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양극화가 고정되면 사회는 활력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경쟁에서 패하더라도 직업 교육과 업종 전환, 개인의 노력으로 재기할 수 있는 유연성과 유동성을 확보해야 한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물론 이와 같은 동반성장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경제가 성장하여 파이가 커지면 결과적으로 구성원들의 소득 역시 올라가게 된다. 또한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면 취업과 창업 기회도 확대되기 때문에, 누구나 노력하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 성장의 원동력은 창조적 파괴, 즉 이노베이션으로 만들어진다. 기술 혁신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을 개발하고 성장산업으로 확립시켜나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기술혁신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정부의 의지, 대기업의 선도와 중소기업의 자조 노력만 있다면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 동반성장을 통해서 말이다."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누자

 

"동반성장은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누자는 사회 작동원리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그리고 개인과 집단 사이를 공정한 경쟁을 기반으로 한 동반자 관계로 조성하여 지속가능하도록 운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반성장은 어느 한쪽에만 이익이 돌아가는 '승자 독식의 경쟁'을 배제하고, 참여자 모두에게 정당한 몫이 돌아가는 협력적 경쟁을 추구한다." 

 

 

 

있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없는 사람에게 주자는 것이 아니다.

 

"동반성장에서 '함께 나눈다'는 말의 의미는 있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없는 사람에게 주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경제 전체의 파이는 크게 만들되, 분배는 좀 더 공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동반성장은 그 개념이 매우 넓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동반성장뿐만 아니라 빈부 간, 도농간, 지역 간,수도권 · 비수도권 간, 남녀 간, 국가간 동반성장 등 매우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회 전반에 적용할 수 있다."

 

『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 - 정운찬

 

 

 

 

 

 

 

 

 

조수미

Casta Diva

벨리니(Vincenzo Bellini)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몸이 녹으며 눈이 감긴다.

 

 

“하나님께선 무엇 때문에 밤을 마련하섯나?"

우리를 재우시기 위해 우리를 아모 생각 업시 쉬이게 하시기 위한 것 같다...ㅎㅎㅎ 

 

2021.02.04 봉제산 한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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